작성자 : 518유족회
작성일 : 2024-01-24
조회수 : 1345
[전문] 정호용 전 특전사령관이 5.18진상조사위에 제출한 진정서
진정서
수신 :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발신 : 정호용 전 특전사령관
주소 : 경기도 과천시 사기막길 1**-1 (문원동)
주민번호 : 32****-10***** 전화 : 010-25**-64**
<진정 취지>
1. 본인은 10.26과 12.12 사건이 종결된 후인 1979년 12월 13일 특전사령관에 보직된 자로 5공집권시나리오가 무엇인지 모른 채 특전사령관직을 맡은 자이고 국정수습 방안과 관련하여도 그 본질을 감지하지 못하였고 전두환 장군을 비롯하여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2. 본인은 1979. 12. 13 특정사령관에 부임하여 보안사의 지침를 무시하고 최세창 3여단장의 발포를 문책하고 김오랑 소령 장례식을 부대장으로 거행하고 국립묘지에 안장하여 허삼수 대령으로부터 반역자라는 비난을 받았고 1980. 2 창당 자금 모금과 관련하여 허화평 대령과 심한 알력이 있었고 1980. 4 허문도가 주도하는 언론통폐합법 제정을 반대한 일로 허삼수 대령으로부터 비난을 받는 등 5공 세력인 허화평, 허삼수, 허문도 등 핵심 인물과 계속된 불화와 갈등으로 5.18 광주 사건이 발발하자 이들은 고의적으로 본인과 거리를 두고 적대시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이런 사실은 당시 보안장반이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3. 이상과 같은 여건으로 5.18 당시 본인은 광주 진압 작전에 배제된 상태였고 사건 발생 3일이 지난 후, 광주와 서울 간 통신 보안을 위한 연락 임무 및 광주지역에 작전 배속된 부대의 인사 및 군수 지원을 위하여 광주를 방문한 것었고, 작전지휘를 하려고 방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네 차례에 걸쳐 총 80여 시간 현지를 방문하여 인사, 군수 지원 업무를 수행할 뿐이었습니다. (작전지휘권이 없음)
4. 그런데 1988년 노태우 대통령이 3당 합당을 하는 조건으로 야당 JP, YS에게 본인을 정계에서 제거한다는 각서를 썬 준 후, 본인을 5.18 당시 작전 지휘를 한 책임자로 몰고 국회의원직을 박탈당하였습니다. 그 후 본인은 전두환 장군과 같이 5.18 책임자로 매도되었고 1996년 처벌을 받게 된 것입니다.
5. 청문회 이후 모든 언론 기관에서 본인을 5.18 책임자로 거론하여 매도되었으나 본인은 실제로 5.18 진압 작전에서 지휘권 특히 발포와 관련하여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으며 도청 탈환 작전의 경우도 소준열 장군이 묻기에 경험이 있는 부대를 알려주는 조언을 해주었을 뿐이고 실질적으로 방관자였을 뿐입니다.
6. 1996년 재판에서 처벌을 받았으나 본인은 전두환 장군과 공모한 사실이 없고 예하 여단을 타부대에 작전 배속시켜서 작전지휘권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특전사령관이라는 이유로 처벌을 받은 것이 억울함을 호소합니다.
1. 충정부대 배치 명령은 육군본부의 작전명령이고 본인의 명령이 아니라는 주장
본인은 1980.5.17.일 22시 30분 육군본부 작전 명령에 따라 충정 부대(특전사 시위 진압부대)를 지시한 곳에 배치하라는 명령과 출동지역 사령관에게 작전 배속을 시키라는 명령을 따랐을 뿐이고 본인이 부대 배치를 한 사실이 없으나 본인이 관여한 것처럼 조사된 것을 재조사해 진실을 규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2. 본인이 광주에 헬기로 출동하게 된 경위 배경
가. 본인은 예하 부대로 1,3,5,7,9,11,13 여단 등 7개 여단을 보유하고 있으나 계엄 이후 7개 여단이 모두 다 타 부대에 작전 배속되어 본인의 지휘 하에는 병력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본인은 5월 17일부터 20일 오전까지 사령관 집무실에서 여러 여단의 행정지원 업무만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나. 보안반장 김충립 소령이 <광주와 서울 간의 유무선 통신을 통제하고 광주 현지와 서울 계엄사령부 간에 연락 임무를 하고 예하 여단에 인사와 군수 지원 업무를 하는 것이 좋겠다>는 조언에 따라 보안반장이 요청하여 배속된 헬기를 이용해 광주 현지를 방문하여 예하 여단의 인사와 군수 행정지원도 해주고 광주 현황을 계엄사령부에 전달할 목적으로 광주를 간 것일 뿐 육군본부나 보안사령관 등 상부의 지시나 명령으로 출동한 것이 아닙니다.
다. 본인은 실제로 3,7,11여단의 작전 업무에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예하 여단장들의 상관은 작전 배속된 31사단장 정웅 사단장과 전교사령관 윤흥정 장군인데 본인이 그분들의 권리와 책임에 끼어들 일이 아닙니다. 현지를 방문하여 작전 수행 업무와 관련 없는 지원을 했을 뿐입니다.
라. 작전 기간 10일 중에 3일간 머물며 작전 지휘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만약 본인이 작전 임무를 맡았다면 현지에 24시간 상주해야 합니다. 본인이 광주에 머문 시간은 20일 오전에 가서 오후 5시경 상경하여 5시간 머물렀고, 21일 17시에 가서 22일 16시 상경하여 24시간 머물렀고, 23일 17시에 가서 25일 15시 상경하여 46시간, 26일 밤 9시 광주에 도착하여 작전 개시까지 5시간 합계 약 80시간 머물렀습니다. 즉 10일 동안 3일 정도 머물렀는데 작전 업무를 수행하였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본인이 작전 임무를 수행하였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닙니다.
3. 실탄 분배와 발포와 자위권 발동 지시가 본인과는 관련이 없다는 진실 증언
가. 본인은 예하 여단의 실탄 지급 내지는 경고 사격, 엄호 사격, 자위권 발동, 발포 등 사격 명령과는 전혀 상관이 없으며 국군이 국민을 향하여 발포를 하게 된 상황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발포가 있어서는 안 되며 시민들의 희생을 막아야 한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고 발포와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나. 특히 발포 문제와 관련하여 여러 부대에서 본인이 나타나기 이전에 이루어진 것이고 본인은 지휘 통솔권을 가지고 있지도 않은 상태에서 본인보다 상관인 전교사령관이 지휘하고 있고 정웅 사단장에게 배속되어, 작전지휘권이 없는 본인이 발포와 관련이 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니 철저히 조사해 주시기 바랍니다.
4. 작전 지휘 이원화, 지휘소 설치와 관련된 진실 증언
가. 1988년 언론 청문회 당시 본인이 현지에 가서 작전 지휘를 했다는 증언은 사실이 아닙니다. 18일, 19일, 20일 오전에 서울에 있었기 때문에 작전을 지휘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 정웅 사단장이 1988 언론 청문회에서 지휘소를 설치하고 본인이 작전 지휘를 하였으며 PRC-25 무전기로 비행기 내에서나 서울에서도 지휘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은 본인과는 관련이 없는 주장입니다.
다. 21일 신우식 7여단장 임시 숙박소에서 21일 밤 잔 일이 있는데 이 사무실도 신우식 장군은 작전지휘권이 없이 기거하고 있던 사무실에서 자고 온 것이고 교도소 내에 특전부대 지휘소가 있었다 하더라도 본인과 상관없는 최세창 장군 지휘소인지는 몰라도 본인이 지휘소를 운영하지 않았습니다.
5. 소준열 장군에게 전두환 장군 친서 전달 관련 진실 증언
본인은 21일 오후 광주에 도착해서 22일 소준열 장군 취임식에는 참여하였으나 전 장군의 메시지를 전한 사실이 없습니다. 변호사를 통해 소준열 장군이 전두환 장군 메시지를 23일 또는 24일 본인으로부터 받았다고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본인은 모르는 일이며 사실이 아닙니다.
6. 오인 사격 현장 방문 및 부상자 위문 경위
23일 오후 광주에 가서 24일 효천역 부근에서 11공수 여단과 보병학교 병사들 간에 오인사격으로 희생자가 있었다는 보고를 받고 현장에 갔었고 병원에 문병을 갔다가 야간이라 헬기 비행이 어려워 다음 날 참모차장 비행기 편으로 상경한 사실이 있으나 이는 작전 임무와 관련된 일이 아니고 후생 복지를 위해 활동한 것일 뿐 작전 업무와 관련이 없음에도 작전 지휘를 한 것으로 알려진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7. 본인이 광주사태 주동자로 지목된 경위 배경
가. 본인은 집권시나리오와 정국수습방안에 대하여 전두환 장군이나 허씨들로부터 들은 바도 없고 그들이 보기에 비협조자였습니다. 본인은 정치참여나 권력욕이 없을뿐더러 상급자에게 아부하거나 권력이나 힘을 과시하는 부하들을 혼내주는 편이어서 5공 핵심 허화평, 허삼수, 허문도와도 사이가 나쁜 관계로 배척(왕따)을 당하고 있던 자입니다.
나. 50사단장이라는 한직에 근무하면서 10.26 사건과 12,12 사건과는 전혀 무관한 자이고 1979년 12월 13일 특전사령관직에 보직되어 전날 저녁 최세창 장군이 정당방위를 한 것이라는, 보안사령부의 지시를 묵살하고 발포가 잘못되었다 책망하고 김오랑 소령 장례를 부대장으로 하고 국립묘지에 안장시킨 것으로 인해 5공 핵심 허삼수 대령으로부터 비난을 받았고, 김충립 보안반장은 반역자라는 욕을 먹는 등 5공 핵심들로부터 경계 대상이 되었던 자입니다.
다. 1980년 2월 전두환 장군 요청으로 정당 창당자금 모금과 관련하여 허화평 대령으로부터 극심한 수모를 당한 사실이 있습니다. 또한, 1980년 4월 허문도 중정 비서실장이 주도한 언론통폐합법을 반대하여 이 법 통과를 11월로 미루는 결과를 초래하여 허삼수 대령으로부터 모욕적인 비난을 받은 사실이 있습니다.
라. 상기 네 가지 이유로 입장이 난처해진 본인은 5월 광주사건이 발생하자 허씨들로부터 배척당하는 처지가 되어 작전 임무를 부여받지 못하고 사령부에 대기하게 되었던 바 김충립 보안반장이 사령부 장석규 대전복 과장에게 부탁하여 광주에 출동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 따라서 본인은 5공 집권시나리오나 정국수습 방안 연구에 참여한 일이 없으며 보안반장 김충립 소령으로부터 돌아가는 분위기를 청취하고 있었으나 본인과는 상관없는 일로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전두환 장군이 본인에게 집권시나리오나 정국수습방안에 대하여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은 세 허씨들이 본인과 불편한 내색을 보이는 등 영향이 컸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바. 본인은 1980년 5월 31일 국보위 상임위원 임명장을 받으러 오라 해서 참석한 자리에서 오래전부터 집권시나리오가 준비되고 있었다는 감을 잡았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주동자로 몰린 것은 현지 지휘관이나 작전참모 같은 자들이 자신들의 책임을 본인에게 전가한 것이고 1988년 언론청문회 당시 노태우 대통령이 의도적으로 본인을 주동자로 몰고 국회의원직을 사퇴한 후 모든 언론인들이 본인을 주동자로 몰아간 것이고 MBC 드라마 등 여러 연속극에서 본인을 주동자로 몰았기 때문에 피해를 본 것입니다.
나. 누구의 지시인지 모릅니다. 5.18기간 동안 작전참모를 찾았더니 광주에 가 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다. 광주에 가서 무엇을 했는지 모르며 5.18 당시 만난 기억이 없습니다.
라. 장 대령이 1996년 조사 시 언동은 거짓입니다. 본인은 장세동 작전참모로부터 광주에 간다는 보고를 받은 사실이 없고 광주에 가서 무슨 일을 하였는가에 대한 보고를 받은 사실이 없습니다.
마. 장 대령은 작전참모였지만 <제2인자, 전두환 분신>이라는 평을 받고 있었습니다.
9. 5월 17일 전군지휘관 회의, 강경 발언 계엄확대 필요성 강조한 내용
가. 검찰 조사 시 본인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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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용 전 특전사령관 "5·18 유혈 진압 억울하다"…조사위 "책임 배제 못해"(남도일보)
https://www.namdo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755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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