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하다 보니, 윤광장 선생님을 몰랐습니다. 윤광장 선생을 가장 쉽게 설명하는 말은 5.18 마지막 수배자 윤한봉 선생의 친형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설명은 선생에 대한 무례입니다. 학생들을 가르치고 품어온 '영원한 오월교사' 윤광장 선생의 5.18 역사를 따라가 봤습니다.
■ "동생 재판을 보면서 내가 세상을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구나!"
역시 얘기는 동생 윤한봉 얘기로 시작됐습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 전에는 본인은 평범한 교사였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동생 윤한봉이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집안 전체가 용공, 간첩으로 몰리면서 인생 항로가 달려졌다고 했습니다. 재판 과정에서 동생이 논리적 정당성을 주장하는 과정을 쭉 지켜보면서 "내가 세상을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구나" 느꼈다는 겁니다.
바뀐 생각은 당시 광주 대동고 교사로 일하면서, 자연스레 동료 교사들과의 활동 도모로 이어졌습니다. 가장 낮은 저항 운동으로 앰네스티에 가입해 활동했다고 했습니다. 뭔가를 더 도모하려면 가끔 만나야 하는데, 엄혹한 유신 시절 조직 이름을 갖는 것만으로 정부 '안테나'에 걸릴 수 있으니 만나서 고스톱이나 치는 모임으로 위장했습니다. 그래서 정한 이름이 '삼봉회'입니다.
삼봉회 활동은 책 읽는 모임, 양서협동조합 창립으로 이어졌습니다. 윤광장 선생 기억으로는 1979년 9월 옛 광주 YWCA 2층에 사무실을 냈다고 합니다. 그곳은 곧 광주지역 민주화 운동 인사들의 사랑방이 됐습니다. 양서조합에는 고등학생들이 자유스럽게 드나들었고, 그 학생 중에는 제자인 광주 대동고 학생들도 끼어 있었습니다.
"대동고 학생들 독서회가 조직됐어요. 자연 발생적으로 자기들끼리, 그 양서조합에 드나들던 애들을 중심으로. 나중에 들으니까 독서회 이름을 '목암'으로 지었드만요." |
학생들과 유대는 깊어졌습니다. 그리고 역사는 5.18이란 비극을 불러왔고, 우연인지 필연인지 목암에서 5.18 참여자가 많이 나왔습니다.
■ "지금 나가면 개죽음이다." 온몸으로 막아선 학생 시위
"(1980년) 5월 18일은 일요일이었잖아요. 그래서 19일에 학교에 갔더니, 수업 할 분위기가 아니에요. (학생들이) '우리 부모 형제, 형님들, 누나들을 다 죽이고 있는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책상에 앉아서 책벌레처럼 공부만 하고 있으면 되겠습니까? 선생님은 저희를 그렇게 안 가르쳤잖아요.' 이렇게 달려드는데 제가 할 말이 없대요." |
윤광장 선생은 당시 대동고 상황을 들려줬습니다. 학생들이 학교 운동장에 모여 시내 상황과 계엄군의 만행을 얘기하는 학내 집회를 열었고, 시내 진출을 시도했다고 했습니다. 다급해진 윤광장 선생과 동료 교사들은 " 지금 나가면 개죽음이다. 너희들하고 똑같은 심정이다마는 지금은 때가 아니다."라며 교문 앞에 드러누워 학생들을 막아섰답니다. 그리고 다음 날 광주 시내 전역에 고등학교 휴교령이 내려졌다고 회고했습니다.
학생들의 집단 동요와 참여를 막으려는 조처였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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