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에 맞선 남편 그리워…5·18 헌법전문 수록됐으면”(전남매일)

작성자 : 518유족회

작성일 : 2024-06-03

조회수 : 872

“계엄군들의 무차별 폭행 희생자가 제 남편이 될 줄은 몰랐죠.”

고 조사천 열사의 아내 정동순씨(70)는 1980년 5월 외신기자가 아들 조천호씨를 촬영한 ‘5월의 꼬마 상주’사진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1980년 정씨는 남편 조사천 열사와 함께 전남대학교 후문 근처에서 건축업체를 운영했다.

그해 5월 갑작스레 비상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됐고, 직원들의 통금시간이 생기면서 일찍 문을 닫게 됐다.

조 열사는 5월 20일 공사현장을 점검하고 퇴근하던 길 계엄군이 광주교육대학교 정문 앞에서 학생들을 무차별 폭행하는 것을 목격하고 ‘학생들을 때리지 마라’며 뛰어들었다.

집에 돌아온 조 열사는 계엄군의 만행이 잊혀지지 않은 표정이었고, 다음날인 21일 동료들과 점심식사를 한 뒤 시위대에 합류하러 나갔다.

남편과 동료들은 오후 1시께 금남로로 향했고, 정씨도 아들에게 밥을 먹이고 30분 후 뒤따라 갔다.

정씨는 “5·18 이전에는 여느 가정과 다름없이 평범했지만, 퇴근길에 계엄군이 시민들을 폭행하는 모습을 보고 남편이 분노에 차 있었다”며 “남편과 동료들은 시위대에 합류한다고 했고, 금남로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집단발포가 있던 21일 조 열사는 시위대 대열 속에 있었는데 전일빌딩 옥상에 주둔하던 계엄군의 M16총탄이 좌전 흉부를 관통했고, 광주기독병원으로 이송되던 중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정씨는 뒤늦게 남편이 총에 맞았다는 소식을 들었고, 시내 병원을 수소문하다 기독병원에서 눈도 감지 못한 채 누워있는 남편의 시신을 발견했다. 곧바로 아버지에게 사실을 알리고자 자리를 비웠는데, 돌아와 보니 어느새 조 열사의 시신은 온데간데 없었다.

다음날 조 열사를 찾아나선 정씨는 옛 전남도청 앞 광장에서 관 속에 있는 남편을 발견했다.

정씨와 자식들은 남편이자 아버지인 조 열사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고, 정씨와 주변 동료들은 남편의 시신을 서둘러 상무관으로 임시 안치했다.

정씨는 “겨우 남편 사진을 구해 관 앞에 뒀고, 아들이 아버지의 사진을 안고 울고 있는 모습이 프랑스 사진 기자 프랑수아 로숑에게 찍힌 것을 뒤늦게 알았다”고 말했다.

프랑수아 로숑은 5·18 당시 신군부에 의해 고립된 광주에 잠입한 두 명의 프랑스 사진기자 중 한 명으로, 광주의 참상을 전 세계에 알린 ‘꼬마 상주’의 사진을 촬영한 인물이다.

정씨는 망월동 묘지에서 남편의 장례를 치른 후 조 열사의 뜻을 이어받아 5·18 항쟁 기간 주먹밥을 만들어 시민군에 전달하거나 헌혈에 동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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