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생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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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민주화의 봄과 5·17비상계엄 전국 확대

박정희 대통령의 피격으로 유신독재 체제가 붕괴된 이후 억눌려 왔던 민주화의 기대와 요구가 1980년 봄부터 일시에 분출되기 시작했다. 반면 신군부는 12·12군사반란을 통해 군권을 장악한 이후 사회혼란과 북한의 남친 위기설을 조장하며 국가권력의 강점을 시도하였다. 1980년 5월 15일, 최규하 대통령의 귀국과 민주 일정을 밝히는 담화 발표 예정, 비상 계엄 해제 결의를 위한 임시국회의 소집 공고, 전국 대학생 대표자 회의에서 시위 중단 및 학업 복귀 결정 등으로 정권탈취의 기회를 잃게 될 위기 의식을 가진 신군부는 5월 17일 전군주요지휘관회의의 결의임을 내세워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헌정을 중단시키는 쿠데타를 자행했으며, 전국의 주요 도시에 공수부대를 투입시켰다.



공수부대의 투입과 무차별 유혈 진압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확대와 동시에 전국의 주요 도시에 공수부대가 투입되었고, 광주에도 7공수여단이 투입되어 전남대와 조선대에 진주하였다. 1980년 5월 18일 아침, 전남대 정문과 후문에서 학교에 들어가려던 학생들과 학교를 점령하고 있던 공수부대간의 첫 번째 충돌이 일어나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어 학생들은 시내로 진출하여 시위를 전개했고, 공수부대는 오후 4시경부터 시내에 투입되어 작전을 전개했다. 시내에 투입된 7공수부대는 작전개시 40분만에 300여명의 시민들을 연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공수부대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무차별한 구타를 자행한 후 연행하면서 지켜보는 시민들의 공분을 불러 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시위자들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상가와 주택가에 난입하여 기물을 파괴하고 집안에 있던 사람들에게도 무차별한 살상을 가했으며, 붙잡힌 사람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팬티만 입힌 채 기합과 희롱을 일삼다가 트럭에 싣고 갔다. 모두가 광주시민의 공분을 불러 일으키는 결과가 되었다. 한편 광주 시내에서 별다른 상황이 없었던 정오 무렵 학살책임자들은 다시 11공수를 광주에 추가 투입시켰다. 광주에 투입되어 작전을 전개한 공수부대의 병력이 지나간 길거리에는 피가 흥건하게 고일 만큼 사상자가 속출하는 유혈참극이 계속되었다.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항거

공수부대의 총개머리판과 곤봉, 심지어 대검에 의한 유혈 자극이 시내 곳곳에서 자행되는 것을 지켜보던 시민들은 마침내 스스로 공수부대를 광주에서 몰아내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위기 의식이 공분으로 발전하여 1980년 5월 19일 오후부터 적극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각목과 쇠파이프로 자위적 무장을 하고 대행했으나 대검 등으로 중무장한 계엄군에게 밀려 다닐 수 밖에 없었다. 1980년 5월 20일 오후4시경 무등경기장에서 출발하여 금남로까지 전개된 차량시위는 계속 밀리기만 하던 시민들에게 한층 공격적인 저항을 불러 일으키는 촉발제가 되었다. 이후 시민들은 차량으로 공수부대의 저지선을 밀어붙이는 등의 공격적 방법으로 저항하기 시작하여 계엄군이 마침내 밀리기 시작했다. 이날 늦은 저녁 광주역에서 시민들에게 고립된 공수부대는 현장에서 집단발포를 자행하여 많은 시민들의 인명을 살상했다.



계엄군의 집단 발포와 무장 봉기

5월21일 계엄군은 시민들에게 밀려 전남도청을 제외한 모든 지역의 진압작전을 포기하고, 도청 주변과 주둔지였던 전남대와 조선대에 집결하고 있었다. 1980년 5월 21일 오후 1시경, 시민대표와 도지사가 협상을 끝내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던 시민들을 향해 공수부대는 도청 앞 광장에 도열해 있다가 도청 옥상에 설치된 스피커의 애국가를 신호로 집단발포를 자행하였다. 도청 주변의 주요 건물에 사전 배치되어 있던 저격수와 동시에 집단발포가 이루어지자 금남로를 가득 메우고 있던 수십만 군중이 일시에 흩어졌고, 현장에서 54명이 사망한 것을 비롯하여 시내 병원마다 사상자가 넘쳐날 만큼 엄청난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공수부대가 집단발포를 자행하자 시민들은 광주인근에 있는지, 파출소를 습격해 무기를 획득하여 자위적으로 무장하면서 마침내 광주시민들은 무고한 양민을 학살한 공수부대에 저항하기 위한 무장투쟁을 시작했다.



시민자치 공동체

1980년 5월 21일 도청 앞에서 집단발포를 자행한 공수부대는 오후 4시경 광주에서 퇴각하기 시작했다. 이미 경찰 병력도 자체해산되어 광주는 국가공권력의 공백상태가 됨과 동시에 외부로 통하는 모든 도로가 철저히 차단된 채 고립되었다. 그러나 고립무원의 광주는 자체적으로 항쟁지도부를 구성하여 시민군을 중심으로 치안질서를 유지하는 한편, 광주를 고립시키고 있는 계엄군과 저항했다. 이자치공동체 기간 동안 광주는 세계사에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높은 도덕성을 발휘하였던 바, 시내 은행에 보관되어 있던 수천억원의 돈이 그대로 지켜졌으며, 시민들이 십시일반 거둔 쌀로 주먹밥을 만들어 시민군에게 제공하고 생필품이 부족한 가운데서도 매점매석이 없었다. 언론에서는 연일 광주를 무장폭도들의 난동으로 무정부상태가 되었으며, 시민들의 피난길이 줄을 잇고 있는 것으로 보도하고 있었다. 한편 광주 시내에서 퇴각한 계엄군은 시 외곽에 주둔하면서 광주고립작전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집단양민학살을 자행하여 광주시민들의 고립감을 고조시켰다.



최후의 항쟁

1980년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은 광주의 항쟁지도부가 요구했던 협상안을 거부하고 광주재진입작전인 충정작전을 시작했다. 고등학생들과 여자들을 모두 집으로 돌려 보낸 항쟁지도부는 도청 민원실에서 밤 12경 모두 식사를 한 후 각자 집으로 전화를 걸어 자신이 도청에 있다는 소식을 알리게 했다. 도청 앞쪽으로 탱크와 장갑차가 진입하고 모두 세 방향에서 진입해 온 계엄군은 미명의 도청과 광주공원, YWCA, 계림초등학교 일대에서 움직이는 물체마다에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항쟁은 죽음으로 끝이 났으며, 당시 도청에는 200여명의 시민군들이 저항했으나 체포되거나 부상으로 실려 간 사람은 100여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발표된 사망자의 수는 모두 17명이었다.



진실의 왜곡과 탄압

민주일념과 공수부대의 잔혹한 만행에 대한 공분으로 일어섰던 5·18민중항쟁은 5월 27일 새벽, 참혹한 죽음으로 끝나면서 ‘무장폭도들의 난동’으로 조작되었다. 수백명이 구속되었고, 그 중 4명은 사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이후 전두환 정권은 5·18진실을 철저하게 은폐하면서 진실규명에 대한 국민들의 요구를 탄압해 왔다. 5·18학살을 통해 수립된 정권인 만큼 재임기간동안 5·18에 대한 원죄로부터 한시도 자유로울 수 없었던 전두환 정권은 권력 연장을 획책하다가 6월 항쟁에 무릎을 꿇었고, 마침내 자신은 법정에서 국가내란 및 내란목적 살인 혐의로 단죄를 받아야 했다.



진실규명 투쟁과 5·18재판

1980년 5월 27일 새벽, 계엄군에 의해 참혹하게 학살 당했던 광주는 그 죽음으로 그냥 주저앉지 않았다. 다시 투쟁이 시작되었고, 그 투쟁은 정의와 진실을 이 땅위에 바로 세우려는 모든 민주 세력들에게 반성과 계승의 계기점이자 민족, 민주운동의 최전선에 위치했다. 5·18가족들은 일년 내내 계속되는 탄압에 맞서 거리로 나서 학살정권의 실체를 폭로하여 5·18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군화발과 최루탄과 맞서 싸웠으며, 미문화원 점거, 대학생들의 잇단 분신과 투신의 항거로 다시 지펴진 5·18진실규명 투쟁은 고립된 광주의 항쟁이 전국으로 확산된 제2의 5·18투쟁으로 타올랐다. 마침내 1996년 12월, 학살책임자들은 법정에 세워졌고, 5·18민중항쟁은 헌법이 보장한 국민저항권으로 인정되어 국가기념일로 제정되었다. 17년 투쟁의 결과였다.